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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3/31) 「위대한 개츠비」 모임이 있었다. 나는 바빠서 참여하지 못할 예정이었지만, 모임 시간이 미뤄지면서 참여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고전으로 하는 독서모임은, 그것도 집근처에서 열리는 모임은 귀하다. 나는 비록 미국 문학을 싫어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런 귀한 모임에는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책은 꽤 읽었으되,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써보자.

1. 첫 독서와 그 이후

처음 이 책을 잡았던 건 스무살 혹은 스물 한 살 때였다. 재수가 끝났을 무렵의 나는 100만원을 모아서 친구 J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인천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살짝 멀미를 하며 중국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 집어 들었던 것이다. 그때도 고전 책읽기를 좋아했으므로 무심코 집어들었다.

​하나 실수한 점이 있다면 조금 옛날 번역의 책을 가져갔다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책이 재미가 없었다. 어쩌면 배멀미를 해서였기도 했을까.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내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이후에 이 책을 다시 읽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을 지나며 내 주관이 뚜렷이 생겼다. 미국문학을 싫어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시련」, 「호밀밭의 파수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의 책들을 읽었지만 하나같이 다 별로였다. 내가 싫어했던 것은 미국 문화였을 수도 있겠다. 특히 「호밀밭의 파수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그랬다. 하지만 「시련」처럼 그냥 소설 자체가 형편없이 느껴진 경우도 있었다. 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좋았다. 헤밍웨이도 달랐다. 미국 문학같지 않았달까. 하지만 대체로 내가 느낀 미국 문학은 대체로 별로였다.

이 「위대한 개츠비」 모임에 나갈 지 말지를 고민했던 것도, 내가 미국문학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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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대한 개츠비」

이번 독서에서의 감상을 간략하게 적어볼까. 일단, 미국 문학에 대한 내 반감과 첫 독서에서의 안좋았던 인상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가 생각보다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내용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언제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게 될까, 하고 기다리기도 했다. 예일대에서 운동선수로 활약한 톰 뷰캐넌이 삶에 대한 다소 무식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과 과학을 맹신하듯 신봉하는 것과 그런 톰과 결혼한 데이지는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불륜은 이 소설에서 꽤 가볍게 그려진다. 이런 것들이 미국 소설의 특징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모파상의 소설 「어느 인생」이나 「벨 아미」에서 불륜을 묘사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묘사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모파상과 톨스토이는 그 문제를 꽤 무겁게 다룬다. 소설 속 갈등의 가장 깊고 큰 요소로 다룬다. 불륜이 성행하는 시대 상황을 묘사한다는 점은 피츠제럴드와 유사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환기한다. 그런데 톰과 머틀의 부적절한 관계는 너무나도 쉽게 수면위로 올라와있고, 그에 따른 데이지의 절망 또한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려져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안에 성취된 개츠비의 성공 또한 과히 미국적이다. 부자였던 댄 코디의 후계자가 되었다가, 갑작스럽게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것, 또 그 이후에 아마도 밀주 등의 불법적인 방식을 동원해 돈을 벌었다고 하는 개츠비에 대한 묘사는 미국이 아니라면 벌어지기 힘든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가 공감을 못하게 하는 것은, 개츠비가 한 모든 행동이 한 여자 데이지를 위한 것이라는 설정이다. 나로 하여금 심지어 반감까지도 사게 하는 것은, 나는 한 여자를 위해 저렇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적이없어서일 것이다. 한때 좋아했고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데이지를 위해서 이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해냈다는 설정은 내게는 그럴듯하게 여겨지지 않고, 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남자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끼거나 공감을 느끼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여하튼 개츠비는 성공적으로 뉴욕 퀸즈 인근에 정착한다. 데이지의 사촌오빠인 닉 캐러웨이의 옆집이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쨌든 뷰캐넌 부부의 시야가 닿는 곳에 위치한다. 매일 파티를 열고 수많은 손님을 초대하던 개츠비는 닉과도 친분을 쌓게되고, 마침내 닉을 통해 데이지와 접선하는 데 성공한다.

부도덕한 사람에게는 남의 부도덕함이 더 잘 보이는 법이듯, 톰은 금세 개츠비와 데이지 사이의 관계를 알아채고 만다. 이들은 직설적이다. 톰은 개츠비의 잘못을 직접 지적한다. 그런데 개츠비는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넘어, 데이지가 한번도 톰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욕실이 여러 개 딸린 호텔방을 빌리고 그 사이를 질주하는 그들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말들. 그건 프랑스에서 말하는 데카당스(décadance)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향락이 너무 과한데, 그것은 미국적인 어떤 정서를 형성하고야 마는 것만 같다.

데이지가 운전하는 개츠비의 차가 머틀을 칠 때 소설은 클라이막스를 맞이한다. 이 사건은 얼마나 많은 걸 상징할까, 아니면 단순히 우연이라고 봐야 할까. 윌슨이 감금하고 있던 머틀이 바로 그 순간 길에 뛰어든 들 수 있었던 것은 왜였을까. 머틀은 다가오는 차가 톰의 차라고 착각했을까. 데이지는 머틀이라는 것을 알고 속력을 줄이지 않았던 걸까. 즉 머틀의 죽음은 데이지의 의도에 의했던 것일까.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애착이 갔던 인물이 무엇이었냐’는 독서모임 발제문에, 나는 윌슨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비극적인 인물을 좋아한다. 무언가 완벽하지 않고 인간적인 고통을 받는 등장인물을 나는 좋아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인의 부정을 알게 된 후의 윌슨의 당혹스러움은, 그가 어리숙한 사람이었기에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윌슨의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일 것 같다. 그에게 있어 머틀의 죽음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그가 살아나가는 이유의 상실과 그에 따른 막막함을 의미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윌슨은 복수를 달성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헛된 복수였다. 윌슨의 연적인 톰을 죽인 것도 아니고, 머틀을 치고 달아난 당사자 데이지를 죽인 것도 아니었고 죄없는 개츠비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개츠비가 허위와 위선의 사회 속에서 그에 물들지 않았던 올곧음과 솔직함을 상징한다면 개츠비의 죽음은 그 미덕들이 그 사회에서는 통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만 같다. 윌슨이 어리석고 범속하지만 악하지는 않은 비극적이고 평범한 사람을 상징한다면, 윌슨의 죽음은 수많은 범부들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만 같다. 그들의 반대급부에 서있는 뷰캐넌 부부는 계속해서 살아나간다. 골프 경기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던 조던 베이커도 계속 살아나간다. 닉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대신 새로운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그 존재가 스러지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만다.

소설을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았던 또 한가지 장면은, 개츠비의 장례식에 아무도 오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몇몇은 오기를 꺼렸을 수 있다. 뒤가 깨끗하지 않아 보이는 졸부의 죽음에 끼고 싶어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은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많은 개츠비의 파티 손님들 중 한 명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는가. 만약 내가 개츠비와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면, 궁금해서라도 장례식에 참여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개츠비가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가 피상적이었을 지라도, 죽음 직후에 관심이 뚝 끊긴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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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츠비와 뒤루아

이 소설을 읽고 바로 생각난 소설은 모파상의 「벨 아미」였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작가는 화자 닉 캐러웨이와 주인공 개츠비를 통해 당대의 부도덕함을 파헤치려 했을 수 있겠는데, 모파상은 주인공 자체를 부도덕한 악한으로 두고 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 돈과 성공은 그 무엇보다도 앞선 가치로서 표현된다. 윌슨이 톰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건 「벨 아미」에서 빈궁했던 뒤루아가 재산을 쟁취한 후에 대단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도 성공지향적 혹은 물질만능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보이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개츠비」에서의 미국만큼은 아니었다.

​「벨 아미」와 「위대한 개츠비」는 그 제목에서도 유사성이 보인다. 피츠제랄드가 모파상의 소설을 보고 비슷하게 쓴 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이다. bel ami는 “좋은 친구”, “잘생긴 친구”라는 뜻으로 뒤루아의 별명이다. 잘생긴 외모의 뒤루아는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일종의 중의적인 풍자의 의미가 섞여있다. 정말로 ‘좋은 친구’인 것이 아니라 별명이 그런 것일 뿐인 것이다. 개츠비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정한 이 제목은, 개츠비가 정말 괜찮은, 수많은 불가능을 이겨내고 마침내 데이지 옆에 선 대단한(great) 사람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의 성공이 투명하지 않았으며,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는 조금 비꼬는 의미에서의 great gatsby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두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벨 아미」에서는 악당 뒤루아의 성대한 결혼식이 있는 반면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초라한 장례식이 있다. 편집장으로서의 대단한 직위와 주식투자로 많이 번 돈에다가, 당대의 유력한 집안의 여자를 꼬드겨 결혼에 골인하는 뒤루아는, 수많은 군중들의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반면, 개츠비는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한 이후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고 심지어는 소수만이 참여한 초라한 장례식을 맞게 되는 것이다.

​뒤루아가 성공한 악당이었다면, 개츠비는 성공할뻔 했던 악당일까, 아니면 순수하고 정직한 비련의 주인공일까. 뒤루아가 평면적인 인물이라면 개츠비는 참 입체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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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상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써보았다. 독서모임에서 평점을 몇 점 주겠느냐고 했을때, 나는 5점 만점에 3.5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보통 고전에 대해서는 점수를 후하게 주는데 이정도는 낮은 편이다.

그래, 내 생각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이 아주 재밌다거나 공감가거나 하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소설 자체는 굉장히 괜찮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플롯 속에 여러 가지 인간 군상들과 사건들, 그리고 당시 세태를 알 수 있게 만드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잘 녹아들어 있다. 말하자면, 미국 소설 치고는 그래도 괜찮다, 정도로 말하고 싶다. 그리고 모임에서도 그와 같이 평했었다.

참고 자료들

읽은 책의 판본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192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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