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 「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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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는 푸리에 분석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11월에는 George Eliot의 「Silas Marner」를 원서로 읽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책 읽는 것들을 병행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책을 많이 읽는 데 더 치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12월은 고전소설 읽기로 채워지고 말았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채식주의자』,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 「황야의 이리」,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이때 읽은 책들이다. 한편 헤세의 「게르트루트」는 7월에 한 번 읽어놓았고, 다시 읽으며 블로그에 「로스할데」에 이어 글을 쓰려고 했으나, 아직 다시 읽지 못했다. 그밖에 읽고 있는 책들은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 등이다.
언급했듯 「게르트루트」를 시작으로, 읽은 책들에 대하여 차례로 글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보다는 새로 책을 들어 읽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 평소의 나는 하나의 책도 여러 번 읽고 오랫동안 생각하며 천천히 소화하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쉬는 동안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욕심에, 그러니까, 다시 없을 이 시간을 활용하여 마음껏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한 번씩만 읽고 다음 책으로 넘기는 것을 반복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내게 ‘요새 뭐하고 지내?’라고 하면 ‘수학 공부하고 책읽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 부끄러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아침 9시마다 도서관에 출근하는 부지런한 생활을 하고 있다.
「게르트루트」에 대한 글을 아직 쓰지 못한 건, 그리고 올초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한 건 바로 그때문이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지와 노력을 소진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글이 써지는데, 자꾸 손에 새로운 책이 쥐어지게 되므로 글을 쓸 만큼의 시간은 소요하지 못하고, 정신도 한 책에만 경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혹은 억지로 글을 쓸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과 「벌집」에 대한 글은 마음에 들었지만 「로스할데」에 대한 글은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에 반해 「달과 6펜스」에 대한 글을 문득 쓰게 된 것은, 비록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밖에 읽지 않은 책이지만, 책을 읽으며 생각이 모이고 모여 쓰지 않고는 못견디는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내일(12/27) 있을 독서모임에 대한 감상 글로도 활용할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존댓말 투로 쓰겠다.
1. 책읽기
「달과 6펜스」를 처음 읽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이 책은, 매주 한 권씩 책을 읽어야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중에, 자발적으로 읽게 된 몇 안되는 소설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노는 토요일의 하교시간에 「달과 6펜스」의 하이라이트를 보느라 정신없이 책에 정신이 팔렸던 버스 안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책에 대한 인상은 꽤 강렬했고 또 좋아하게 되어서, 아마 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한 번정도 더 읽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독서모임을 위해 읽은 것은 두번째 혹은 세번째 독서가 된 것 같습니다.
이번 독서에서 책을 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 읽었던 책이고 어려운 책은 아니었기에 금방 스르륵 읽을 것 같은데, 그럴거면 돈을 쓰거나 책장을 차지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근처 도서관을 뒤졌지만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그런지 이미 사람들이 대출해간 뒤였습니다. 그러다 지난 주, 한 광역시를 여행하게 되면서, 해당 지역의 도서관에 「달과 6펜스」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여행 중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여행지를 방문하며 도서관에 들를 생각을 한 건, 당시 읽고 있었던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에 나오는 하리 할러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스르륵 읽을 것이라는 예상은 꽤나 정확해서, 여행 중의 이틀동안 200페이지를 읽었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속도는 꽤 더뎌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행이 끝나 더이상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지막 부분의 독서속도가 왜인지 늦춰졌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본가를 방문하며 고향의 도서관에 찾아가 또 몇 십 페이지를 보고, 다시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다시 책을 빌려 읽는 것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책을 열심히 봤던 것 치고 그 이후에 「달과 6펜스」를 자주 찾지 않은 것은, 어쩌면 영문학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저는 영미권의 소설들보다는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의 문학이 왠지 더 끌렸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버지니아 울프나 토머스 하디, 에밀리 브론테와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영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지금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을 즈음에는 서머싯 몸의 책도 진지하게 볼 마음이 났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서머싯 몸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는 가히 천재적으로 보였습니다. 헤세 소설들에 나오는 ‘구도자적 깨달음’이나 도스토옙스키 소설들에 나오는 ‘병적인 고민’ 같은 대단히 강렬한 테마는 없어도, 평범한 듯한 문체로 수수하게, 특이한 인물과 재미있는 서사에 가만히 몰입하게 하는 작가의 글에 속절없이 빠져들었습니다.
2. 스트릭랜드와 스트로브
처음 읽었을 당시에 가장 눈에 들어왔던 인물은 당연히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였습니다. 강렬한 열정으로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습니다. 별처럼 자신의 길을 초연하게 걸어가는 그에게는 다른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뚜렷이 정하고 그것에 천착하는 모습은 숭고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스트릭랜드가 이기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은 그의 단점이자 장점처럼 보입니다. 그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뚜렷이 지향하고, 누가 곁에 있건 아니건,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같은 곳을 향해 바라볼 수 있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괴팍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학을 떼고 떠나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야성적인 매력으로 작용하여, 소수의 사람들이 이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스트릭랜드만큼이나 개성있는 인물은 더크 스트로브입니다. 살아가다가 제 스스로가 이기적으로 느껴지면 스트릭랜드를 떠올리게 되고, 구차하고 찌질하게 느껴지면 스트로브를 생각하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보면 스트릭랜드와 스트로브는 인간의 두 극단, 이기성과 이타성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인물들이 아닐까 합니다.
배알도 없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추는 스트로브는 멋은 없을지언정 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여자도 스트로브에게서 매력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스트로브 같은 사람이 있어야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뻔하고 형편없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스트로브는 적어도 허위로 대중을 속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에서의 엘로이 키어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스트로브는 순수하게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이타적입니다. 영혼이 맑고 깨끗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스트릭랜드와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한심할지언정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예술적이라고까지 보입니다. 스트릭랜드의 진가를 알아본 제일 먼저 알아본 감식안은 그런 스트로브의 순수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3. 세 명의 여자들
소설 속에는 스트릭랜드를 사랑한 여자가 세 명 나옵니다. 에이미와 블란치, 그리고 아타가 그들입니다. 도시의 허영, 차분함 속에 숨겨진 열광, 자연 그대로의 경외로운 사랑. 이 셋은 점진적인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셋 중 가장 ‘공인된’ 사랑은 당연히 에이미(스트릭랜드 부인)와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에이미가 스트릭랜드를 사랑했는지, 아니 적어도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봤는지 하는 것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술을 단지 보여주기 식으로만 인식하고 이해하는 에이미는 소설 제목의 ‘육펜스’를 차지하며 스트릭랜드의 ‘달’과 확연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만, 에이미가 예술의 관점에서 무의미할지언정,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가장 정상적인 인물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녀는 엄연한 피해자이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가장의 희생양입니다. 어쩌면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인혜와도 상황이 유사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혜와는 다르게, 에이미의 고난과 슬픔에는 왠지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에이미 같은 여자의 품을 스트릭랜드가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쩐지 잘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반면에 블란치의 사랑은 적어도 솔직함을 전제합니다. 블란치에게 작용했던 동기는 화자의 말처럼 성적인 호기심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스트로브같은 남자에게 보호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과거를 감추려 침착함과 청결함으로 무장했던 블란치는 무의식적으로 스트릭랜드에 빠져들게 되지만 그 결말은 뻔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의 요란하고 대단한 불행은 늘상 있는 통속적인 치정극에 불과하거나 (화자의 지적처럼) 파리 시의 자살 미수자 통계수치가 올라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미는 가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능동적인 여성입니다. 본인의 평소 관심사에다 사업적인 센스를 보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는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근데 그런 것 치고 스트릭랜드에 대한 태도는 가히 피동적입니다. 스트릭랜드의 속내를 떳떳하게 마주하려 하기는커녕 질투로 일관하고, 직접 스트릭랜드를 찾아보려 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간접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녀는 현대적인 방식의 인간관계를 세련되게 활용하여 스트릭랜드를 되돌아오게 하도록 시도하는데, 그런 노력은 스트릭랜드에게 닿을 수 없습니다. 이미 스트릭랜드는 그러한 형태의 ‘부인의 사랑’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입니다. 그에 비해, 블란치는 (그리고 아타는) 스트릭랜드가 어디에 가건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좋아하는 남자를 무조건 따라가는 모습을 진취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고리타분하다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자의 사랑에 질색하는 스트릭랜드는 에이미의 품을 경멸하고, 블란치에 대해서도 똑같이 손사래를 치게 됩니다. 하지만, 아타에게서는 얼마간 만족감을 느낍니다. 마지막 순간, 가까운 사람들은 떠나가고 남은 자식들마저 병으로 죽어 오로지 스트릭랜드와 아타만 남게 된 산 속 깊은 곳에서, 스트릭랜드는 에이미와 블란치의 관심과 사랑을 싫어했던 것처럼 아타의 보살핌도 덫으로 느끼고 싫어했을지, 아닐 지는 모르겠습니다.
본인을 때린다는 남편에게 되려 헌신적으로 붙어있는, 이해할 수 없는 아타의 태도에서는 어떤 원시적인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문둥병에 걸린 스트릭랜드를 보살피고 끝까지 지키는 모습은 더이상 열일곱살의 미소 띤 소녀가 아니라, 성숙하고 강건하며 주체적이고 초인적인 인물입니다. 마치 스트릭랜드가 본인의 미약한 삶을 투신해 모든 것을 버리고 얼마간의 예술적 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처럼, 아타도 모든 걸 바쳐 스트릭랜드에 미친듯이 매달렸습니다. 둘은 기약없는 희망을 품고 열정적으로 매달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날벌레가 빛나는 불을 향해 제 몸을 던지듯, 그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열렬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4. 고갱과 픽션
서머싯 몸은 소설을 사실처럼 잘 둔갑시키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화자를 작가로 설정하여 마치 본인이 직접 이 사건과 인물들을 관찰한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스트릭랜드가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고, 그래서 독자는 어느정도 스트릭랜드를 고갱에 투사하여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갱의 위키피디아를 뒤져보니 스트릭랜드의 행적은 고갱과 일부 비슷해보이기도 하지만, 꼭 같지는 않았습니다. 고갱이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했던 것은 맞지만, 일을 그만둔 주된 계기는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족과 결별한 이유는 그가 돌연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아내가 떠나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트릭랜드가 고립된 인간관계를 추구했고, 그린 그림을 팔려고 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고갱은 동시대의 동료 화가들과 교류했고 후원자로부터 지원을 받아 생활하기도 했으며, 그림을 팔아 타히티로 떠날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갱은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보다 방탕하게 생활했고, 그때문에 소송과 재판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며 숱한 원주민 여성들의 원성을 삽니다.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묘사된 것과는 달리, 고갱은 타히티가 서양 문명에 물들어있는 것에 실망하여 (소설속에서는 그 이름만 언급되고 있는) 마르키즈 제도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찾아보고, ‘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네. 엉터리네.’하고 실망하여 책을 닫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남성우월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을 옹호하는 나쁜 소설이네’라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미워한다고 해도 정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 아니며 스트릭랜드는 고갱과는 별개로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입니다. 또한, 스트릭랜드가 제멋대로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고갱의 악덕을 순화시킨 면도 있습니다. 현실은 소설보다도 더 심했던 것입니다. 서머싯 몸은 단지 고갱의 삶을 참고하여 새로운 인물 찰스 스트릭랜드를, 더크 스트로브와 블란치 스트로브를, 에이미 스트릭랜드와 아타를 만들어냈고, 그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독자가 읽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현실의 진실을 얼마간 반영하는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스트릭랜드처럼 개성있는 인물에 너무 빠져들다보면, 에이미 같이 평범한 인물들은 희화화되기 마련입니다. 마치 스트릭랜드처럼 야수적으로 본인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거의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십중팔구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매장당할 것입니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인혜의 남편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주고 모든 것을 파괴할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픽션이 인상적으로 남는 까닭은, 목표를 정하고 열정적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이 질서와 타성으로 점철된 현대 도시의 삶과 대비되어 많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5. 「로스할데」
최근에 읽었던 다른 소설이 고갱과 「달과 6펜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로스할데」에서 정열적인 화가 페라구트를 등장시킵니다. 스트릭랜드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진 그는 온 하루를 들여 최선을 다해 그림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페라구트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성공한 화가이고, 그로 인해 꽤 많은 경제적인 수입을 얻어 가족을 부양하고 있으며, 가족과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트릭랜드가 런던과 파리의 도시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말년에 자연 그대로의 타히티를 동경했던 반면, 페라구트는 처음부터 시골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술에 대한 광적인 집념은 페라구트로 하여금 그림과 가정생활을 양립하기 힘들게 만들었고, 점차 그는 가족과 멀어지게 됩니다.
스트릭랜드의 아내 에이미가 사교적이고 허영심 있는 사람이었던 것과는 달리, 페라구트의 아내 아델레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델레의 그런 성격은 페라구트의 가정에 대한 무심함을 오랫동안 참고 견딜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문에 둘 사이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서) 둘 사이의 거리는 천천히 멀어지게 됩니다.
페라구트는 스트릭랜드에 비하면 온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스트릭랜드처럼 파괴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창작에 몰두하는 페라구트의 모습은 스트릭랜드보다 꽤 건설적입니다.
페라구트의 첫째아들 알베르트가 ‘타히티에서 그림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 화가가 있대요’라고 언급하는 부분은, 이 소설 역시 폴 고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서머싯 몸과 헤세는 세 살 차이의 동시대 인물이고, 두 소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달과 6펜스」 : 1919, 「로스할데」 : 1914). 그런 걸 보면 고갱의 삶이 당시 사람들의 기억에 인상깊게 남지 않았나 합니다.
- 소설 정보
- 책이름 : 「달과 6펜스」
- 작가 : 서머싯 몸
- 출판사 : 민음사
- 최초출판연도 : 1919년
- 참고자료
-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민음사, 2000
- 위키피디아 :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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