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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세 소설 읽기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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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에 어느 독서모임에 참여하느라 헤세의 「싯달타」를 다시 읽었다. 그러다 문득, 헤세의 소설들 중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을 마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장편소설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위키피디아 헤르만 헤세 문서의 novel 항목에 중편소설(novella) 한 편을 포함시킨 것이다.

  • 1904, 「페터 카멘친트」
  • 1906, 「수레바퀴 아래서」
  • 1910, 「게르투르트」
  • 1914, 「로스할데」
  • 1915, 「크눌프, 그 삶의 세 이야기」
  • 1919, 「데미안」
  • 1920,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 중편소설
  • 1922, 「싯다르타」
  • 1927, 「황야의 이리」
  • 1930,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1932, 「동방으로의 순례」
  • 1943, 「유리알 유희」

중고등학생 때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을, 스무살 때 「크눌프」,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이후에 「페터 카멘친트」, 「황야의 이리」,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읽었으니 위 소설들 중 여덟 편은 적어도 한번씩 보았다. 반면, 「유리알 유희」는 두어번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한번도 완독하지 못했다.

이번에 두 권의 책 「로스할데」와 「게르투르트」를 집어서 읽었다. 둘다 헤세의 초기 소설들로 「페터 카멘친트」와 「크눌프」에서와 같이 조금 덜 정제되었지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소설들이다. 이제는 열 편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이고 앞으로 두 편을 더 보면 헤세의 모든 장편소설을 읽은 셈이 된다. 물론, 헤세가 쓴 단편소설집들과 산문집, 시집들은 거의 읽은 게 없기도 하고, 「페터 카멘친트」나 「황야의 이리」 같은 소설들은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다. 그래도 헤세의 소설을 다 봤다는 사실 자체는 뿌듯할 것 같다. 다만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여 서두르고 싶지는 않다. 이럴 때일수록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하고 찬찬히 읽을 필요가 있다.

2. 예술가가 등장하는 소설들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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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헤세이다보니, 어느덧 나만의 헤세론(Hesse 論)이 생겼다. 즉, 내가 생각하기로, 헤세의 소설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고 생각된다. 혹은, 내가 헤세의 소설들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아래의 세 가지의 생각에 수렴하게 된다.

첫번째는, 헤세의 소설들에는 자아에 대한 회복 내지는 자아 회귀에 대한 주제가 보인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대표작 「데미안」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다. 내면의 소리에 천착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싱클레어와 데미안, 피스토리우스와 에바부인을 통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데미안」 말고도 다른 소설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싯달타는 고매한 스승 밑에서보다 자기 자신에 집중함으로써 더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크눌프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불가피한 심연이 있다고 말하며, 평생을 혼자 떠돌아다니며 살아간다. 그때문에, 헤세의 소설은 그 초점이 주인공 한 사람에게 맞춰져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소설들에서 인물들 간의 갈등, 증오, 사랑, 이해관계 같은 것들이 소설의 주요 사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면, 헤세의 소설에서는 오로지 주인공이 걸어가는 그 하나의 길을 그의 관점에서 가만히 서술하는 것 같다.

두번째는,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방황을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크눌프는 평생을 걸쳐서 내면의 방황과 외면의 방랑을 하는 인물인데, 이것은 골드문트의 경우도 거의 같다. 청소년 주인공인 싱클레어와 한스는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한다.

세번째는, 헤세 소설에는 예술가가 자주 등장했다는 점이다. 골드문트는 끝없는 방황 끝에 조각가 일을 시작하게 된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는 피스토리우스는 연주 소리로 싱클레어의 관심을 끈다. 골드문트와 피스토리우스가 아마추어 예술가라고 한다면, 전문적인 예술가들도 있다. 클링조어는 대단히 유명한 화가로 등장하고, 크네이트는 ‘음악명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다. 이번에 읽은 두 소설에서도 그랬다. 페라구트는 열정적인 화가로서, 쿤은 깊은 인생의 상처를 음악으로 표현해내는 작곡가로서 등장한다.

어쩌면 헤세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귀기울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와 마찰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방황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방황은 예술로서 승화될 수 있다고 말하려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헤세 본인도 예술가였다. 소설가였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본인은 시인으로서의 모습에 스스로 더 정체성을 두었다. 또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니 예술에 대한 헤세의 조예와 관심이 남달랐을 것이고 소설 속에서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인물들이 자주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3. 「로스할데」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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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 남짓의 「로스할데」는 이야기의 줄기가 그렇게까지 뚜렷하지는 않은 소설이다.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그래서 그런 면에서는 조금 심심할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굵직굵직한 사건은 부재하다고 할지라도 소설 속 인물들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그 나름대로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3.1 로스할데의 상황Permalink

주인공인 요한 페라구트는 시골에 살고있는 저명한 화가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는 파리, 브뤼셀,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그가 유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진지한 자세로 하루를 온전히 쏟아 그림을 그려낼 줄 아는 열정적인 예술가이다.

그는 자기 전에 작업하고 있는 그림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침실 옆 칠판에는 ‘몇 시에 깨워주고, 몇 시에 커피와 아침식사를 가져다 달라’는 메모를 적어놓는다. 아침이 되면 하인이 와서 칠판에 적힌 시각에 그를 깨워주고, 간단히 아침을 먹으며 어제 자기 전에 머릿속에 담아놓은 그 이미지를 붓으로써 구현하는 오전 작업을 시작한다. 섬세한 색의 배합과 심사숙고하여 만든 구도를 통해 자연을, 인물을, 혹은 그것에게서 받은 인상을 최선을 다해 표현한다. 점심이 되면 식사를 하러 아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식사를 하고, 오후에도 오전과 같이 온 힘을 쏟아 일에 몰두한다. 저녁에는 길가를 산책하거나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가 살고있는 곳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로스할데’이다. 넓은 정원과 숲, 그리고 호수가 딸린 이곳을 10년 전에 매입하여 지금껏 살고 있다. 혼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족과의 관계가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러한 가족 간의 불화는 이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된다.

아내 아델레와 (아마도 15-20년 전에) 처음 결혼했을 때, 아델레는 페라구트의 쾌활함을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결혼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감수성이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고 성격의 차이를 절감한다. 아델레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나 아델레는,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있을 때 그것을 ‘참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성격차이를 ‘이겨내야 할 역경’이라고 생각하고 그 역경을 천천히 참아냈다. 그러다보니, 남편과의 사이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만약 아델레가 남편과 마찬가지로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면, 결혼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자주 싸우더라도 그만큼 또 자주 화해하면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오히려 초장에 관계가 종식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델레는 조용한 성격과 차가운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멀어졌을지언정 결정적인 파국에 이르지는 않아왔다.

부부 사이의 관계는 자식이 태어나면서 많이들 달라진다고 하는데, 이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째 알베르트가 태어났을 때, 부부는 온 사랑을 다해서 알베르트를 키웠다. 특히 알베르트가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페라구트와 아델레는 함께 열과 성을 다해 알베르트를 간호했고 그 과정에서 따뜻한 정을 나눴다. 하지만 부부 사이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간극은 점점 벌어져만 갔고, 알베르트는 매일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해있는 아빠보다는 늘 함께 있는 엄마에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으며, 알베르트가 어느 정도 컸을 때에는 페라구트를 적대하고 미워하기까지 한다.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은, 부부 사이의 갈등보다도 더 첨예해졌고, 페라구트는 알베르트를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부자간의 충돌을 유예시켰다. 알베르트는 평소에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방학 때만 집에 오므로 아버지와 마주칠 일이 적어진 것이다.

아내와의 관계를 견디기 어려워한 페라구트는, 3년 전부터 아내가 지내는 안채 바깥에 그리고 평소 작업하는 작업실 옆에 새로 거처를 지어 그곳에 기거했다. 오로지 식사시간에만 아내와 함께했다. 가족을 떠나는 것, 즉 이혼도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과 떨어질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둘째아들 피에르의 존재였다. 첫째 알베르트가 엄마를 닮은, 그러니까, 엄마와 비슷하게 이성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면, 둘째 피에르는 아빠의 감성적인 면을 닮았다. 아직 일곱 살 밖에 안된 피에르는 성미가 급하고 참을성이 없지만 감수성이 섬세하고 아름다움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평소의 피에르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그림책을 보며 ‘이 글자는 뭐에요?’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며 ‘이 꽃은 뭐에요?, 저 새는 이름이 뭐에요?’하고 물어보며 엄마와 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하인들이 일하는 곳에 가서 이것저것 또 물어보거나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마저 지루해지면, 아빠가 일하고 있는 아틀리에(작업실)에 와서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는다. 천진한 피에르는 로스할데의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피에르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은 부부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만, 피에르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빠와 엄마 사이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엄마가 생활하는 안채와 페라구트가 작업하는 아틀리에 모두를 자유롭게 왔다갔다할 수 있다. 피에르는 아빠와 엄마를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인 셈이다. 소설 속에서는 피에르를 ‘로스할데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지칭한다.

예술에의 열정을 제외하면, 페라구트에게는 오로지 피에르만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적이 된다. 이전에 알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피에르가 자신을 멀리하고 엄마 편에 서지는 않을까, 아내와 갈라서게 되면 더이상 피에르를 볼 수 없게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

3.2 페라구트의 결심과 그 경과Permalink

소설은, 어느 여름날 페라구트의 친구 오토 부르크하르트가 로스할데를 방문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방학을 맞아 알베르트가 로스할데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부르크하르트는 페라구트의 오랜 단짝친구이자 지기知己이다. 그는 여행을, 특히 동양으로 여행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지금도 제노바를 거쳐 오랜만에 친구를 보러 로스할데에 왔다. 친구와 포도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고, 페라구트 가족에게는 선물도 주며 즐겁게 로스할데에 머무르던 부르크하르트는, 며칠 지나지 않아 로스할데를 뒤덮은 어두운 불화의 분위기를 파악하게 된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페라구트를 잘 아는 부르크하르트는 천성이 예민한 페라구트가 이렇게 거북한 환경속에서는 질식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조언을 건넨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이 가족관계를 끝낼 것이며, 페라구트가 끝내 미련을 가지고 있는 피에르마저도 단념하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페라구트 본인에게도, 그리고 피에르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자기는 곧 인도로 여행을 하게 될 예정이니,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하면, 물리적으로 잠시 떨어져있음으로 해서 서로 감정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며, 그때가서 새롭게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나가건, 아니면 갈라서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행에 참여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조만간 알려달라고 하며, 부르크하르트는 로스할데는 떠난다.

며칠 뒤, 페라구트는 부르크하르트와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하고 이 사실을 편지로 써서 부르크하르트에게 보낸다. 그리고 소설은 이 페라구트의 결심을 전후로 하여 분위기가 바뀐다. 그 전까지는 아델레가 부부간의 역학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두 아들은 아델레의 곁에 더 머물렀고, 페라구트는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독한 가장에 불과했다. 이제 그들을, 아델레와 알베르트와 피에르를 단념함으로써 고독하지만 당당한 존재가 되었다. 페라구트는 더이상 속박되어 있지 않았고 세상 앞에 당당하고 자유로워졌다. 심지어 아내를 대하는 태도도 자못 다정해졌고, 알베르트와의 관계도 좋아졌다.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여, 로스할데를 떠나기 전에 꼭 완성하리라고 생각하는 풍경화 작업에 착수한다 또한, 아이를 두고 번민하는 부부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자전적인 작품도 온 힘을 들여 완성한다.

가족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전후로 하여 피에르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피에르의 영혼이 그토록 섬세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족과 헤어질 결심을 알아차리고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였으며 그게 발병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해야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여하튼, 피에르는 멀미를 하기 시작하고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평소에도 기분대로 행동하는 성향을 가진 아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쉽게 안좋아지고 구토를 하기도 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엄마와 아빠는 의사를 불러 진찰을 하게 하고, 밤낮으로 간호하며 피에르를 돌본다. 그 옛날, 알베르트가 아팠을 때 함께 힘을 합쳐 아이를 돌보던 그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끝내, 피에르는 회복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다. 의사에 따르면 병명이 뇌막염이라고도 했다.

피에르를 간호하던 그 마지막 며칠은, 가족이 하나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피에르를 잃게되는 말못할 슬픔은 페라구트와 아델레가 공유할 수 있었던 마지막 공감대였다. 심지어는 알베르트마저도 페라구트와 정다운 대화를 나눌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급박하고 갑작스러운 상황도 페라구트의 결심을 뒤집지는 못했다. 처음 결심을 했을 때, 가족과의 관계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피에르의 장례를 치른 후 페라구트가 아델레와 알베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4. 감상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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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헤세와 마리아Permalink

이 소설은 우선, 당연히, 헤세의 당시 삶과 연관지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번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썼던 1904년에 헤세는 9살 연상의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게 된다. 재밌는 건 마리아 베르누이가, 걸출한 수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그 베르누이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헤세와 마리아는 아들 셋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게르투르트」를 쓰는 등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갔고, 다만 아내와는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후 1911년에 헤세는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로 긴 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는 이 소설 「로스할데」를 발표한다. 그동안 아내 마리아 베르누이의 정신건강은 악화되었다.

1916년에 마리아 베르누이의 상황을 위키피디아에서는 schizophrenia(조현병)이라고 말하고 있고 데미안 영문판 해설에서는 “his wife suffered a severe mental breakdown, requiring her commitment to a mental hospital”이라고 적고 있다. 이 결혼은 끝내 1923년에 이혼에 이른다. 이에 관해서는 로스할데 책의 해설에 오류가 좀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수년간의 별거생활을 거쳐 결국 1919년에 정식으로 이혼하기에 이른다”라고 써있는데, 데미안 영문판 해설과 소담출판사의 책들, 그리고 민음사의 책에서는 이혼년도가 1923년으로 되어 있다.

막내아들 피에르가 아프게 되는 상황도 헤세의 체험이 반영된 것 같다. 마리아와의 셋째 아들 마르틴은 1914년에 뇌막염 진단을 받았고 1916년에는 매우 아팠다고 되어 있다.

아내의 정신 질환은 헤세로 하여금 칼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공부하게 했으니 「데미안」을 쓰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인도로의 여행은 「싯달타」를 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로스할데」가 아내와의 이혼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조금 놀랍다. 마리아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 속 아델레는 그저 평범하고 침착한 여자처럼 보인다.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헤세의 당시 부인인 마리아를 손가락질 하지는 않았을지, 이 소설의 발간이 혹시 마리아의 이후 병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지 하는 점도 궁금하기는 하다.

4.2 피에르Permalink

부부 싸움의 희생양은 언제나 그 자식들이 될 것이다. 순진무구하고 귀여운 피에르의 모습은 페라구트와 아델레 사이의 첨예한 갈등과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엄마가 머무는 안채와 아빠가 작업하는 아뜰리에를 제 마음대로 천진난만하게 돌아다니는 피에르를 상상하노라면 로스할데는 그 어떤 마찰도 없는 평화로운 공간인 것만 같다.

“이 꽃은 이름이 뭐에요?” 피에르가 물었다. 소년의 갈색머리카락 속에서 햇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드러난 가는 종아리도 햇볕에 그을려서 빛나고 있었다. 소년이 허리를 굽히자 햇볕에 그을린 목덜미 아래 상의가 내려간 틈으로 등짝의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패랭이꽃이란다.” 엄마가 말했다.

만약 이 책이, ‘예술가처럼 천성한 예민한 사람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라면, 그 예술가적인 사람의 가장 순수한 모태를 피에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피에르는 그 누구보다도 페라구트의 현신이다.

피에르는 오토 부르크하르트의 무릎 위에 앉아 허리띠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사람은 많은 것을 전부 다 알 수는 없단다.” 부르크하르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저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도 많아. 그럴 때는 그것이 예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단다. 네가 언제 한 번 아저씨가 있는 인도에 오게 되면, 며칠 동안 커다란 배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을 거야. 배 앞에는 정말 작은 물고기들이 뛰어 오르는데, 유리 같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도 있단다. 종종 새들도 날아오는데, 너무도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완전히 피로에 지치지. 그래서 배 위에 앉아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바다 위에서 몰려다니는 광경을 보고 놀라워하는 거란다. 새들은 우리들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하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고 싶지만 그렇게는 안된단다. 그래서 서로 마주 보면서 머리를 끄덕일 뿐이지. 새들은 충분히 쉬고 나면 몸을 흔들고는 다시 바다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단다.”

피에르는 세상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입체적인 아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피에르를 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평면적이기만 하다. 가정교사 선생님은 피에르에게 ‘착한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훈계한다. 피에르는 풀밭 속을 구르거나 웅덩이를 뛰어넘거나 나무를 오르고 싶지만, 그런 일을 하고난 후에는 하인 로베르트나 엄마에게 꾸중을 듣게 된다. 피에르가 가장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형 알베르트이다. 어른도 아니면서 마치 어른처럼 설교하듯 말하는 형의 태도를 피에르는 도저히 견디지 못해한다. 그것은 마치 크눌프가 친구 로트푸스의 ‘이제 너도 자리잡고 결혼해야지’와 같이 말하는 훈계조의 말에 반발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4.2 알베르트Permalink

헤세의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은 꽤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싱클레어와 싯달타는 아버지가 구축해놓은 질서있는 세계에 한계를 느끼고 벗어나려 한다. 한편 싯달타는, 본인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는 아들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싯달타」에서 싯달타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한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모두 보여준다면, 「로스할데」에서는 아들에 집착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페라구트에서, 아버지에 반발하는 아들의 모습은 알베르트에서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데미안」과 「싯달타」 혹은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에서와는 달리 「로스할데」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은 일방적으로 반목하지는 않고 화해의 기미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을 작별을 마주한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의 일시적인 타협이기도 할 것이고, 새로운 삶의 형식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알베르트는 무작정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들은 아니다. 그 배후에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대한 존경이 있다.

“나더러 도대체 왜 예술가가 되어 캔버스마다 물감을 칠해 대는 거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휘두를 꼬리가 없어서 그림을 그리는 거라고 말이다.”

알베르트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꼬리가 없다뇨?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주 간단하지. 개나 고양이, 그 밖의 영리한 동물들은 모두 꼬리를 갖고 있어. 생각하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동요하는 마음에 따라, 또 생활감정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수시로 꼬리를 흔들어 표현하는 거야. 놀랍고 완벽한 아라베스크식 언어를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그런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제법 활기찬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해. 그래서 그들은 붓이니 피아노니 바이올린 따위를 만들어 내는 거야······”

4.3 페라구트Permalink

페라구트는 참 인상적인 사람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온 신경과 마음을 다 쏟아가며 재능을, 열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발휘하는 모습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적인 성공과 사회적인 인정도 부럽기만 한다. 온 하루를 들여 최선을 다해 일하는 그 열정을 보고 있으면, 나 또한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림을 그릴 건 아니지만 다른 영역에서, 페라구트만큼은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페라구트가 지독히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서두에 헤세의 소설에는 ‘자아회귀’에 대한 주제가 자주 보인다고 썼고, 나 또한 이것이 중요하다고도 생각한다. 페라구트는 정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 예술가로서의 모습에 천착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다.

서머싯 몸의 스트릭랜드와도 닮았다. 「달과 육펜스」는 「로스할데」보다 뒤늦게(1919) 나왔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모티브가 되는 폴 고갱을 알베르트가 언급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스트릭랜드가 여러 사건들에 휘말리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던 것은, 단지 스트릭랜드가 페라구트와는 달리 도시에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만약 사람 인(人) 자가 의미한다고 말해지는 바와 같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에 중요한 가치를 둔다면, 아무래도 페라구트와 스트릭랜드는 낙제점을 받을 만한 인간들이다. 예술가로서의 페라구트의 모습에 경탄한다고는 해도, 가족과의 갈등 문제에 있어서 페라구트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예민하고 기분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페라구트와 지내는 것을 어려워 하는 아델레가 이해되고, 또 한편으로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미친듯이 연구하고 탐구하는 페라구트도 이해가 된다.

마치 헝가리의 수학자 에르되시를 생각하게 한다. 예술 분야만큼이나 수학 분야에도 워낙 외골수적인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성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나는 페라구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든 수학자들이 그러한 ‘미침’을 드러내놓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수학자들은 에르되시와는 달리 그러한 열정을 마음 속에 고요히 숨기며 살아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에르되시나 페라구트 같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평판은 좋지 않을지언정, 예술이나 수학을 더 자유롭게, 더 마음놓고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르되시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괴델은 끝까지 자신을 지지해줄 여자를 찾아 결혼했고, 둘은 (조금 특이했지만) 평생 서로 사랑했다. 한편, 오일러는 자식을 13명이나 낳을 정도로 다복한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여하튼, 페라구트나 스트릭랜드, 그리고 에르되시처럼 외골수인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에 보면 페라구트는 결국 자신의 결정이, 그러니까 ‘헤어질 결심’이 옳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찾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고 있다. 애정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피에르를 장례식에서 떠나보낸 후, 그는 자유와 함께 고독감을 느낀다. ‘국외자’라는 단어는 크눌프와 골드문트를 생각나게 하고, ‘별을 따라간다’는 표현은 데미안을 떠오르게 한다.

그에게 남은 것, 그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그는 예술을 단 한 번도 지금처럼 확실하게 느껴보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밖에서 서성이는 자, 즉 국외자의 위안이었다. 그런 국외자들은 삶 자체를 온전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완전히 마셔 버릴 능력이 부여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삶 자체를 철저히 자기 것으로 살아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또 그에게 남은 것은 열정이었다.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과 남모르는 긍지를 가지고 창조하는 것에 대한, 기이하고 냉랭하지만 억제할 길 없는 열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실패로 끝난 그의 삶의 침전물이며 가치였다. 이 현혹되지 않는 고독과 표현하고자 하는 냉엄한 욕구 그리고 옆길로 빠지지 않고 이 별만을 따라가는 것이 이제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촉촉하고 향기가 진동하는 정원의 공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과거를 뿌리쳐 떨어낸다고 생각했다. 마치 맞은편 해안에 닿아 쓸모없어진 조각배처럼 말이다. 그의 시련과 인식 속에 체념 따위는 없었다. 의지와 대담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새로운 삶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새로운 삶에는 손으로 더듬거나 망상 속을 헤매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로지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용기 있게 오르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아마도 그는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보다 더 늦게, 그리고 더 쓰라리게 젊음의 감미로운 황혼과 작별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초라한 신세로 때늦게, 한낮의 광채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귀중한 시간을 단 한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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