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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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참여하고 있는 어떤 독서모임은, 3개월간 모임에 참석하거나 주최하지 않으면 독후감을 써내야 한다. 최근 이직과 회사 일로 매우매우 바빴기 때문에 주최는커녕 참석도 할 새가 없었다. 그래서 어제 (9/13) 후다닥 「좁은 문」에 대한 독후감을 써서 제출했는데, 쓴 김에 블로그에도 올려보려 한다. 적당히 그림은 AI로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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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동기

이 책을 읽은 동기는 상당히 장구합니다. 사실 이 책은 고등학생 때 읽었어요. 제 기억 속에는 「죄와 벌」, 「적과 흑」, 「멋진 신세계」등과 같이,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 중에서는 ‘재밌게 읽었긴 한데, 정작 내용이 막 엄청 잘 떠오르지는 않는’ 책 종류에 속했어요. 그러니까 20대가 된 뒤에 ‘아 「좁은 문」 그 책 참 괜찮았던 것 같은데 내용이 뭐였드라.’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20대가 되어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참 좋아하게 되었어요. 참 좋아해서 때때로, 그러니까 20대 초반과 20대 중반과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생각이 날 때마다 수시로 읽게 되었어요. 그 수필집에서 제가 좋아했던 많은 수필 중 하나는 「구원의 여상」이라는 수필이었어요. 여기에는 피천득씨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성상에 대해 이야기되고 있는데요. 그 수필에는 처음에는 성경의 ‘마리아’, 단테의 ‘베아트리체’, 헤나의 ‘파비올라’에 이어서, 「좁은 문」의 두 여자 주인공이 언급됩니다. 이 수필을 세월을 두고 여러 번 읽으면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어? 알리사와 쥘리에트? 이거 「좁은 문」에 나왔던 여자 주인공들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좁은 문」을 읽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사실 피천득의 책을 읽을 때마다 했습니다. 근데 막상 책을 펼쳐도 끝까지 읽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던 청목출판사 버전의 책으로 20대 초반과 중반, 그리고 후반에 시도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단조로워서인지, 아니면 지루해서인지, 아니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지 좀체 다 읽어내지를 못했습니다. 30대 초중반이 되어서도 시도했다가 다른 바쁜 일이 생겨 읽지 못했었나 그랬어요. 그래서, 이 책은 제게는 아픈 손가락처럼 남았습니다, 읽으려 시도했지만 읽지 못한 책으로요.

그러다 올해 중반엔가, 독서모임의 운영자님이 피천득의 책을 가지고 낭독회인가 독서모임인가를 여신 것을 봤어요. 뒤늦게 봐서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또 피천득 생각이 나서 수필들을 읽다가, 또 「구원의 여상」을 다시 읽게 되고, ‘이번에는 정말로 「좁은 문」을 읽어버리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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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 출판사, 번역가

저자는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94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프랑스 작가입니다. 「좁은 문」은 1909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래, 책을 읽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떤 출판사와 어떤 번역가의 책을 읽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정말로 이번엔 읽겠다는 생각을 굳건(?)하게 가졌던 것이지요. 이번엔 왠지 민음사로 읽기는 싫었습니다. 다른 소설 「전원교향곡」과 함꼐 붙어있어서, 소설을 다 읽고도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암튼 민음사는 안끌렸어요.

여러 다른 출판사의 책들을 보다가 ‘열린책들’의 김화영 번역 책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일단 저는.. 열린 책들 특유의 예쁜 표지를 좋아하는데 이 책도 표지가 참 마음에 들었고, 특히 번역이 김화영 교수님이라 이 책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0년전엔가 어떤 출판사의 「이방인」 번역 논란(?)이 좀 있었을 때, 자주 비교되곤 했던게 김화영 번역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또 사르트르에 대한 김화영님의 책을 읽은 적도 있어서, 저는 프랑스 문학 하면 이분의 번역이 괜찮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이라 옛 어투를 사용하시기도 하는데, 오히려 저는 옛날 말이나 한자어가 많이 포함된 글을 좋아해서 제 취향에도 맞는 듯합니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그건 번역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원래 소설 자체의 난이도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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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설의 첫 장章

책 읽기를 길게 끌다가는 다 못읽을 걸 알고 있어서, 동네 도서관에서 빌리고는 바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책, 특히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책들이 가끔 그렇듯 장(章, chapter)로 나뉘어져있었는데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소설의 첫 장에는 주인공 제롬과 그 가족을 둘러싼 상황이 묘사됩니다. 10대 초반에 일찍 아버지를 여읜 제롬에게 외가 친척들과 교류가 잦아지고 친해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외삼촌 뷔콜랭 가족과의 교류는 제롬의 유년시절에서 중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했습니다. 한 살인가 연상인 알리사 사촌누나와 두 살인가 연하인 쥘리엣 사촌여동생, 그리고 그보다 어린 로베르는 제롬과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소설의 첫 장은 그들의 어머니이자 제롬의 외숙모 뤼실 뷔콜랭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치게 되는 불행을 묘사합니다. 뤼실 뷔콜랭에게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남겨진 가족에게는 상당한 불행이었으니까요. 비록 가정에 충실한 어머니와 아내가 아니었을지언정, 졸지에 어머니와 아내를 잃게 된 남겨진 가족들은 그주 주말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고, 예배를 주도한 목사는 ‘쉽고 넓은 길로 편하게 가려 하지 말고 조금 어려울 수 있어도 좁은 문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목사는 사실, 식민지 고아였던 뤼실 뷔콜랭을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입양해 프랑스로 데려온 장본인인입니다. 그런 그가 수양딸의 잘못된 행위를 간접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비판하며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파하는 장면은 사춘기 나이였을 제롬과 알리사의 뇌리에 깊게 박힙니다.

여기까지 읽으니, 앞으로의 전개가 너무나도 기대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꼭 소설을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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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약혼의 실패 (4장까지)

이후 제롬은 기숙학교에 입학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립 중학교같은 곳에 들어간 듯한데요. 제롬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첫째로, 제롬이 공부에 재능 혹은 흥미가 많았던 까닭도 있었겠고 둘째로, 제롬은 ‘좁은 문’의 의미를 열심히 공부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어 알리사의 곁에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제롬과 알리사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어요. 사촌간의 사랑, 이건 우리나라 같으면 잘 통용되지 않을만한 정서일 것 같아요. 비슷한 시기(정확하게는 그보다 조금 전)에 나온 하디의 「비운의 주드」같은 소설에서는 사촌간의 사랑이 굉장한 비판을 받는 모습이 보였던 걸로 봐서, 사촌 간의 사랑이 통용되는 것은 (한국, 영국과는 다른) 프랑스 특유의 자유로운 문화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하튼 제롬과 알리사 사이의 사랑이 시작되는데, 그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은 전연 아닌 데다가, 플라토닉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조차도 모호한, 너무나 어설프고 추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둘은 지고의 사랑을 바랐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것은 정말 놀랍게도, 사촌여동생 쥘리엣의 존재였습니다. 제롬과 알리사, 이 수줍은 두 청소년은 서로 호감이나 사랑의 말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간에 쥘리엣을 두고 말했습니다. 어린 쥘리엣은 처음에는 사촌오빠와 언니의 말을 서로 전하는 작업을 아무렇지 않게 했겠지만, 어느 순간 제롬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제롬과 알리사 사이의 서로 아껴주는 마음이 지극하다고는 해도, 알리사로서는 여동생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들끼리는, 특히 자매들 사이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언어적인 말들이 오고가는가 봅니다. 제롬은 알 수 없는 두 자매 사이의 미묘한 관계, 양보, 경쟁 그런 것들의 결과로 제롬은 알리사와의 약혼에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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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리사

오히려, 쥘리엣은 자신이 두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 적당한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립니다. 쥘리엣 부부는 고향인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의 르아브르를 벗어나 프랑스 남부, 님과 에그비브로 갑니다. 아이를 여럿 낳으며 살아가는 것이 마치 ‘이제는 감정의 정리가 다 끝났고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다’는 뜻을 제롬과 알리사에게 보내는 듯합니다. 그것을 보며, 제롬은 시간을 봐서 다시 알리사에게 청혼하려 하지만 알리사는 끝내 받아주지 않습니다.

사실 이 부분의 읽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알리사와 쥘리엣은 각각 무슨 생각이고 왜 이런 현상들이 발생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알리사는 본인의 뜻을 자기가 읽은 책에 비추어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의 「팡세」, 라신의 희곡, 성경의 여러가지 말과 해석들, 앨저넌 스윈번의 시들, 피에르 코르네유의 글들을 언급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알리사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하튼, 알리사는 제롬의 청혼을 계속 거절하면서 점점 쇠약해지면다가 돌연 잠적합니다. 제롬과 로베르가 알리사의 행방을 찾았을 때는 한 수도원에서 알리사가 사망한 직후였습니다.

알리사는 제롬과의 ‘지고한 사랑’을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줄리엣이 저 멀리로 갔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랑은 이뤄지면 안되는 것이라고 알리사는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리사는 본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 -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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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쥘리엣

쥘리엣은, 산만해보이는 성격이 플랑티에 큰이모를 닮았습니다. 말이 많고 뚱뚱하고 수더분하고 주책도 눈치도 없어보이는 여자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쥘리엣과 플랑티에 모두 그 안에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사랑의 불꽃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워낙 투박하고 몽땅몽땅해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쥘리엣은 알리사 사후에 제롬에게

불타오르던 과거를, 쌓이고 쌓인 재가 덮어버린 지금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언제라도 볼일이나 유람차 님므 부근에 오시거든 에그비브에도 들러주세요.

와 같은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쥘리엣은 제롬이 자신의 막내 딸 ‘알리사’의 대부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부탁합니다. 제롬이 수락하자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는 것에서도, 쥘리엣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 오빠는, 희망도 없는 사랑을 그처럼 언제까지나 마음 속에 간직해 가리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그렇단다, 줄리엣.”

“그러면, 삶의 바람이 날마다 그 위로 불어닥쳐도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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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감상

첫장을 매우 재미있게 읽은 것 치고는 나머지 일곱 장의 읽기는 꽤 어렵고 솔직히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네 장의 내용이 그랬습니다. 줄거리에 큰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잘 이해할 수 없는 고뇌를 고통스럽게 하는 알리사와 그 알리사를 한없이 기다리는 제롬, 게다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듯한 줄리엣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전반적으로, 알리사의 태도는 다음의 두 관점에서 생각해볼만 할 것 같습니다.

7.1 알리사가 너무 지나쳤다는 입장

어릴 적, 엄마의 비행을 목격한 이후로 본인은 도덕적이고 이치에 맞는 삶을 살겠다는 청교도적인 동기는 이해하겠으나, 그렇다고 계속해서 숨고 피하는 모습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실 알리사의 실제 심경이 어땠는지가 너무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소설에서는 ‘알리사의 일기’를 따로 첨부하는 듯합니다.

알리사의 금욕적인 태도는 종교적인 원칙이 결합됩니다. 즉, 본인의 상황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여, 제롬과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한데 그게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알리사가 정신적으로 쇠약해져서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7.2 알리사가 그럴 만했다는 입장

알리사의 사랑이야기는 안타깝지만, 당시에 알리사처럼 행동했던 여성들은 꼭 알리사뿐만은 아니었음을 다른 여러 소설들에서도 읽을 수있습니다. 알리사가 제롬처럼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사랑이 좌절되자 그 피난처로서 수녀원을 찾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했습니다.

아마도 알리사는 삼남매의 맏이로서, 둘째동생의 성향과 태도 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본인이 제롬과 결혼한다면, 그나마 위태위태하게 유지되어왔던 가족의 평화가 완전히 박살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현명한 알리사는, 둘이서 함께 걷는 위험한 길을 걸으려 하지 않고, 거기서 비켜섬으로써 더 큰 파행을 막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읽고 나서의 첫 감상은 7.1에 가까웠으나, 계속 생각하다보니 알리사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와 같은 7.2의 생각에 더 수렴해가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소설을 열심히 읽고 나니 피천득이 왜 ‘구원의 여상’으로서, 마리아와 베아트리체와 헤나에 이어서 알리사와 쥘리엣을 언급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알리사와 쥘리엣의 이야기야말로 사랑에 관한 미묘하고 아름다우며 슬프고 안타까운 측면을 잘 이야기해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참고한 자료들

  •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열린책들(김화영), 1909(2019)
  •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청목출판사, 190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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