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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 카밀로 호세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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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소설을 많이 안읽어봤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 소설들은 꽤 읽었는데, 스페인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던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작가를 하나 잡고, 그 작가의 소설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찾아보니,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당연히 세르반테스이지만, 그밖에도 많은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만 해도 8명이나 되었습니다. 여러 스페인 작가들 중에서, 너무 옛날 작가가 아니면서, 또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 많은 작가를 찾으니 카밀로 호세 셀라가 보였습니다. 셀라의 소설은 (2000년대 이래로) 적어도 세 편의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나머지 작가들은 대부분 한 편 또는 두 편 정도만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세 편의 소설 중 두 편이 민음사 책들이었기 때문에 읽기가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민음사
  • 「벌집」 - 민음사
  • 「두 망자를 위한 마주르카」 - 한국연구재단

셀라는 198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들은 주로 1930년대 후반의 스페인 내전 전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셀라는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긴시간동안 활동한 작가입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셀라의 첫번째 소설이었습니다. 「돈키호테」가 출간 직후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것과도 조금 비슷하게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대단한 관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내용에 잔인하고 잔혹한 장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금서로 지정됩니다.

역설적인 것은, 셀라가 비슷한 시기에 정권에 영합해 검열관으로 일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소설도 당국에 의해 검열되었지만, 본인 역시 파시즘 정권 아래에서 일하면서 정부의 뜻에 반하는 문학작품들을 검열하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2. 「이방인」과 「인간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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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다 읽고 나서 두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워낙 많이 읽히고 유명한 두 소설들인데, 둘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과 비슷한 시기에 쓰인 소설이다보니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방인」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과 같은 해에(1942)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두 소설이 합쳐진 느낌이면서 좀 더 매운맛이 추가된 형태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두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방인」의 뫼르소는 태양에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가 사람을 죽이게 되고, 체포되어 사형수가 됩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의 파스쿠알 또한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되고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스쿠알의 살인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는 점에서 뫼르소와 다릅니다. 뫼르소가 겪는 현실은 부조리하지만 파스쿠알이 마주하는 세상도 못지않습니다. 파스쿠알의 부조리는 뫼르소의 부조리보다 더 직접적이고 원초적입니다.

「인간실격」의 요조는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27살에 본인의 인생을 회고하는 수기를 씁니다. 그리고 그 수기가 다른 사람(나)에 의해 발견되는 형태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스쿠알은 50대 중반의 나이에 편지를 씁니다. 교도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본인의 인생에 대한 글을 어떻게든 써내려가야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적어나갑니다. 「인간실격」이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이유는 요조가 자신의 죄많은 인생에 대하여 일말의 변명을, 그러니까 지금껏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던 변론을 처절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파스쿠알도, 마치 요조처럼, 본인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편지로 적어냅니다. 그리고 그 편지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 책으로 출간됩니다.

3.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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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쿠알은 가난과 부조리 속에 처해있습니다. 스페인의 한 시골마을,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저는 ‘가난’이라고 하면, ‘가난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희망’이라든지, ‘가난 속에서도 사이좋고 단란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파스쿠알이 태어나 자의식이 생기고 나서 마주한 가난한 세계는, 어떤 탈출구도 생각할 수 없는 잔혹한 가난이었습니다. 일말의 낭만도 없이, 철저하게 비극으로만 이루어진 현실이었습니다.

끔찍한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정신을 갉아먹는 어머니의 언어폭력의 한가운데에 파스쿠알은 태어납니다. 여동생의 뻔한 타락과 어머니의 외도,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 속에는 어떠한 양심도 원칙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파스쿠알이 처한 상황은 뫼르소의 상황보다 더 부조리해보입니다.

소설은 파스쿠알의 결혼을 기점으로 전체 분량의 절반을 지납니다. 그 전까지는 ‘파스쿠알에게 부여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파스쿠알이 만든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고 가난한 파스쿠알의 결혼이 순탄하게 흘러갈 리는 없지요. 결혼식과 신혼여행의 달콤함은, 그 후에 나오는 비극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습니다.

태어난 아이들의 잇따른 죽음과 어머니의 폭언, 파스쿠알의 도피와 아내의 외도, 살인과 처벌, 출소 후의 재혼과 존속살인. 파스쿠알의 비극은 요조의 비극보다 더 잔혹해보입니다.

4.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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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고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 대단한 흡입력으로 소설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아무나 받는 게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작가인 셀라가 혹은 화자인 파스쿠알이, 상황을 너무나도 처절하고 절절하게 묘사했기 때문인지 파스쿠알의 입장이 되어 정신없이 소설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불행을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동생의 끔찍한 상황과 남동생의 비참한 죽음에도 눈을 뗄 수 없었어요.

그런데, 파스쿠알이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는 순간에는 참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최초의 폭력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동생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고 아내를 욕보인 자에 대한 앙갚음이이기도 했지요. 폭력이 아니면 파스쿠알은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폭력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그것도 살인을 일삼는다는 사실은 용납되어서는 안될겁니다. 어느 순간 ‘작가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연민을 가지고 지켜봤던 주인공이 결국 살인자였다고?’하는 배신감이 들었지요. 살인범을, 그것도 연쇄살인범이자 존속살인범인 사람의 변명을 지금까지 읽고 있었다는 환멸감도 느껴졌습니다. 애처롭지만 죄많은 이 인간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 파스쿠알은 뫼르소와 요조보다 훨씬 더한 인물입니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스페인 소설의 한 장르로서 악당이나 부랑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말한다고 합니다. 카밀로 호세 셀라에 관한 어떤 논문(송선기, 2006)을 보니 ‘이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이 되기 위한 모든 요소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피카레스크 소설로 분류할 만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파스쿠알을 악당으로서 규정한다고 하여도 크게 무리는 없어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당 파스쿠알의 애처로운 불행에 대해서는 그냥 눈감고 지나가기가 힘듭니다. “만약 내가 파스쿠알 가족과 같은 집에서 태어났을 때 파스쿠알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되면 범죄자나 살인자를 옹호하는 논리가 될테니 조심해야겠지만 적어도 파스쿠알의 경우에 대해서는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파스쿠알의 마지막 범죄는 그 죄목이 명확하게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내전의 혼란한 상황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파스쿠알은 정적을 제거하고 싶었던 어떤 권력자의 일회용 칼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형당하는 그순간에도 그는 보잘것없었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삽니다. 하다못해 뫼르소처럼 세간의 주목을 받지도, 정돈된 마음을 가지지도 못한 채로 죽습니다. 정말 하찮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평범한 인간의 표상처럼 보입니다.

먼지같은, 벌레같은,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일반적인 어떤 대상을 만났던 것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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