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 「하얀 성」
1. 책 읽기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18년 7월, 역삼동에서 있었던 어느 지정도서 모임에서였다. 독서모임이라는 취미를 처음 가졌던 그 즈음 나는 이 책을 샀고 그 모임에서 받은 책갈피로부터 그날의 날짜를 알 수 있다. 긴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쨌든 책을 읽어내긴 했지만, 이 책을 좋아하진 않았다. ‘왜 나는 나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만큼, 모임에 나가 헤세의 「데미안」과 비교하며 아는 체를 했던 기억이 있다.
파묵을 다시 읽자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작년(2024) 말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을 때였다. 다음 해(2025)에 읽을 책을 선별하던 때였다. 참여하던 두 독서모임에서 ‘다음 해에 읽을 지정도서 책 추천 받습니다’라고 하는 글이 올라왔었고 나는 거기에 여러 책들을 적어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와 함께, 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적어냈던 것이다.
작년 말과 올해 초에는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았다. 헤세의 책 3권과 서머싯 몸의 책 4권과 레싱의 「다섯째 아이」, 그리고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본 뒤 「내 이름은 빨강」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는 게 녹록치 않았다. 잘 읽히지 않았던 데다가 당시 하던 다른 공부나, 취업 준비 등 때문에 책을 놓게 되었다.
그리곤 시간이 흘렀다. 나는 다른 책을,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도 읽었다. 두 책 모두 벼르고 벼른 후에 읽었던 책이라 읽고 나서의 감동이 컸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 「내 이름은 빨강」으로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이름은 빨강」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를 더 하다가, 나는 이전에 읽었던 「하얀 성」을 다시 읽음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기로 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려 읽는 데 성공했다.
처음 「하얀 성」을 읽을 때, 그리고 이번에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면서의 가장 큰 벽은 역시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하지만 「하얀 성」을 다시 읽고 「내 이름은 빨강」을 차차 읽어나가다 보니 튀르키에와 이스탄불이라는 배경이 편해지고 호자와 이맘과 예니시테, 파샤, 파디샤 같은 용어가 입에 붙었으며, 카즈빈, 타브리즈, 에디르네, 게브제, 보스포루스해협, 알레포, 악사라이, 헤라트 같은 지명에 익숙해져갔다. 결국 「내 이름은 빨강」을, 쉽지 않았을 지언정 바로 얼마 전에 다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니 「하얀 성」을 한 번 더 읽고 싶어졌다. 읽는 목적은 첫째로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독서모임을 주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내 이름은 빨강」으로 주최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번에 읽은 것으로 세번째 읽게 되었다. 괜히 좋은 글을 쓰겠다고 글쓰는 것을 미루면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책을 덮은 김에 바로 글을 쓰려 한다. 내일 출근길에는 파묵의 「새로운 인생」을 이어서 읽기 시작할 것이다.
2. 세르반테스 :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는 세르반테스를 연상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소설의 화자는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이로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중에 터키 함대의 습격을 받아 나포되어 이스탄불로 끌려간다. 지식인 계층이자 아는 것이 많았던 화자는 의사 행세를 하며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 신분을 면한다. 그는 새로이 들어오는 유럽인 노예들을 본다.
그들 중 단 한 명이 내 관심을 끌었다. 팔은 잘려 나갔지만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조상 한 명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지만 결국 구조되어 나머지 팔로 기사 소설을 썼다고 했다. (p. 26)
이 장면에서 뜻하는, 기사소설을 쓴 사람이 누군지는 소설을 보면서 바로 떠올랐다. 각주에도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레반토 해전에서 왼팔에 부상을 입었고 알제리에서 오 년간 노예생활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소설이겠다.
노예 신분의 화자는 처음에는 사득 파샤의 밑에 있다가 호자의 소유로 옮겨가며 삶을 이어나간다. 그의 생명이 부지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의 영향력이 긍정적으로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픽션, 꾸며낸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가 처음 했던 거짓말, 즉 의사행세를 했던 것은 최초로 그를 살린 이야기였다. 그는 “해부학 지식이 아니라 머리만을 써서” 치료했다. 이후에 호자에게 하던 말에도 픽션이 많이 섞여 있었다. 유럽인들이 아무도 없는, 게다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있을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호자는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자는 때로 화자의 말을 의심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오간 것은 이야기였다. 반은 사실이되 반은 거짓인, 하지만 사실인지 거짓인지 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중대하지는 않을, 그런 말들이 오갔다.
호자도 자신이 저지른 사악한 짓에 대해 써보아도 손해볼 게 없을 거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가 쓰는 것이 사실이 아니어도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하면 나와 닮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고, 어느 날엔가 이 지식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p. 86)
이후에 호자와 화자는 파디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에서, 다시 청년으로 변하는 파디샤에게는 사실보다는 동화나 우화가 잘 먹혔다. 아니, 파디샤가 장성한 뒤에도 파디샤에게는 사실적인 보고나 사리분별보다는 문학적이고 비유적인 이야기가 더 효과적으로 파디샤의 마음을 끈다.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능력은 호자와 화자의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이 능력을 통해 파디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시 합의를 본 원칙은, 너무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 것, 그러나 우리가 준 정보는 곧 증명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호자는 내가 좋아하던 그 예지력으로 ‘예언은 광대짓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용하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는 생각을 적용시켰다. (p. 115)
이야기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거짓말에 대하여 피천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약간 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정직을 위한 정직은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영국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고, 죄있는 거짓말을 까만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칠색이 영롱한 무지갯빛 거짓말인 것이다. (피천득, 「이야기」)
이 소설은 정말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파묵은 아예, 좋은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여야 하는지까지도 말하고 있다. 좋은 이야기는 음악과도 같아야 한다고 한다.
그는 파디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읽은 후에 아무도 어떤 결론을 유추해낼 수 없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음악처럼 말인가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호자는 놀랐다. 우리는 좋은 이야기란 처음 부분은 동화처럼 천진난만해야 하며, 중간 부분은 악몽처럼 무서워야 하고, 마지막 부분은 이별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처럼 슬퍼야 한다고 생각했다. (p. 121)
나중에 화자는 호자 대신에 궁궐로 불려다닌다. 호자가 파디샤가 무기 제작에 힘을 쏟았던 4년동안이었다. 화자는 파디샤의 신임도 얻고 대신들의 호기심도 끌었다. 이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너무 익숙해진 넉살좋은 우리의 화자는 그들과의 관계도 이야기로서 이어나간다.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흥미로운 이 땅에 대해서, 전에 파디샤에게 했던 것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꾸며 내어 습관적으로 들려주곤 했다. 결혼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러 온 처녀들이나 나와 놀아나던 대사의 부인들뿐 아니라, 잘 차려입은 대사들과 수행원들도 내가 꾸며 낸 유혈의 종교와 잔인한 이야기들, 하렘의 사랑과 음모들에 대해 들으며 감탄했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국가 기밀이랍시고 한두 가지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꾸며 내 그들의 귀에 속삭여 주었고, 아무도 모를 파디샤의 이상한 버릇도 즉흥적으로 꾸며 댔다. 좀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 싶으면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지는 못하는 척했다. (p. 150)
모든 사건이 끝나고, 그러니까 호자가 화자와의 역할을 바꿔서 저편으로 건너간 후, 화자는 호자가 되어 호자의 역할이었던 황실 점성술사를 하던 그 시절도 지난 다음에, 화자는 이스탄불을 떠나 게브제에 머무르며 조용히 산다. 이야기를 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해졌을 때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를 만난다. 에블리야는 화자에게 이탈리아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의 가장 멋진 면은 멋진 이야기를 꾸며 내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p. 191)
이야기를 좋아하는 화자는 에블리야에게 이탈리아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이탈리아의 ‘열세 도시에서 열사흘 밤을’ 보낸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준다.
책에서는 이렇듯 이야기에 대한 말이 많이도 나온다. 세르반테스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한번의 구절에도 이야기에 대한 말들로 가득하다.
(에블리야는) 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찾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 지겨울 정도로 지루한 이 세상에 대항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항상 같은 것이 반복되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이래로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인 곳에서 갇혀 사는 것은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모든 인생을 여행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이야기를 찾으며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마음 속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찾다 보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면 불행해진다고 했다. 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고,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의 삶을 바꾼 그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 속의 어떤 부분을 떠올렸다. 우리는 팔이 떨어져나간 스페인 노예의 희망에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만 쓴다면, 이상한 것을 자신 안에서만 찾는다면, 다른 사람이 된다고 했다. (p. 194)
3. 코페르니쿠스 : 천문학과 점성술과 과학

이야기 말고도 소설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과학이다. 화자는 이탈리아에서 온 똑똑한 청년이다. 미켈란젤로와 르네상스가 있었던 이탈리아에서 화자는 수학과 천문학과 문학을 배워온 지식인이다.
처음 호자의 노예가 되어서 화자가 한 일은 호자에게 이탈리아의 지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개종을 하지 않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화자를 호자가 산 것은, 화자가 가진 서양식 지식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화자가 호자에게 가르쳐준 것은 톨레미(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었던 것 같다. 달보다 더 가까운 천체가 있다는 호자의 주장에 화자는 톨레미의 이론으로서 그것이 거짓임을 설명한다.
그런데 호자도 참 대단하다. 그 모든 화자의 지식들을 6개월만에 다 습득했다고 하던가. 심지어는 화자가 전해준 지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스스로 깨쳤던 것이다. 심지어는 뉴턴의 만유인력과 비슷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어쩌면 행성들이 그 자리에 매달려 있도록 지탱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을 거라고 했다. 예를 들면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어쩌면 어떤 인력. 어쩌면 해처럼 지구도 다른 무언가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하고 주장하기도 했다. (p. 43)
호자는 이렇듯 학문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은 파샤와 파디샤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학문 그 자체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사실 화자와 호자 모두 배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었다. 화자는 오스만 어를 금세 배웠고 호자도도 이탈리아어를 빠르게 익혔다. 천문학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점성술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것을 점성술이라고 하기보다는 말을 잘 해내는 능력이라고 봐야겠지만.
호자와 화자는 세 번에 걸쳐 성공을 거두었고 그로부터 윗사람들로부터의 신뢰와 권력을 얻어낸다. 그 첫번째는 사득 파샤의 아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장식했던 불꽃놀이였다. ‘물레방아’ 작전과 ‘분수’ 작전을 거쳐, 용들이 날아다니는 불꽃놀이는 성공을 거둔다.
이제 사람들은 경악과 두려움으로 함성을 질렀다. 용들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다시 싸우기 시작하자, 일꾼들은 나룻배에 있던 폭죽을 모두 터뜨렸다. 용들의 몸에 부착했던 심지도 제시간에 불이 붙었던지 주위는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완전히 지옥처럼 변했다. 근처에 있는 아이가 앙앙 우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존재는 잊어버리고 입을 벌린 채 지옥 같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p. 35)
두번째 성공은 파디샤에 대한 예언섞인 말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던 사건이다. 호자가 파디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여러 동화를 지어내던 어느 날, 파디샤로부터의 사냥에 같이 가자는 초대를 받는다. 사냥에서의 일화 (사냥을 위해 토끼를 풀어주었을 때 지나가던 들개가 토끼를 잡아가려 했고 파디샤는 토끼를 구해 다시 풀어주라고 명했다,)를 어떻게 해석하냐는 말에 호자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적들이 나타날 것이지만 파디샤는 아무런 사고 없이 그 위험을 넘길 것’이라고 말했고 그 예언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파디샤의 친할머니인 쾨셈 술탄이 파디샤가 사냥하러 나온 사이에 역모를 꾀했다가 실패했던 것이다.
궁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이로부터 한참 후에 들려왔다. 쾨셈 술탄이 예니체리 장교들과 결탁해서, 파디샤와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 자리에 쉴레이만 왕자를 앉히려는 음모를 꾀했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쾨셈 술탄을 코와 입에서 피가 날 때까지 목을 졸라 죽였다.
…
파디샤는 즉시 친할머니의 계략에 대해 말을 꺼냈다. 호자가 그 위험을 예언했을 뿐 아니라, 이 위험한 상황을 온전하게 모면하리라는 것도 예측했다고 말했다. 그날 밤, 아이는 궁전에서 그의 목숨을 앗아 가려 했던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잔인한 개가 토끼를 물어뜯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파디샤는 호자를 칭찬한 후 호자에게 적당한 곳에 수입원을 하사할 것을 명했다. (p. 65. 67)
천문학과 점성술이 연관되어 있었던 건 고대와 중세, 근세에 모두 있었던 경향이기도 하다. 호자의 점성술이 성공했던 것은 그들의 과학이 발휘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조심스러운 처세술과 합리적인 추론, 그리고 그들의 화려한 이야기 능력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참 재밌다.
세번째 성공은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그 병의 기세를 잠재웠던 사건이다. 첫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과학의 승리였다. 화자와 호자의 주도면밀함과 치밀함, 그리고 수치해석의 감각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물론 이야기를 잘 한 것, 그러니까 흑사병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흑사병 예방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도 한몫을 했다.
일은 잘 진행되었다. 우리가 꾸며 낸 이야기가 파디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흑사병은 마치 악마처럼, 사람의 탈을 쓰고,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디샤의 공감을 샀다. 파디샤는 낯선 사람들의 궁 출입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출입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흑사병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를 물었을 때 호자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했고, 파디샤는 도시를 술 취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을 눈앞에 떠올리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아즈라엘이 눈에 띄는 사람들을 손으로 잡아 끌어당긴다고 말했다. 호자는 당황하여 즉시 정정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아즈라엘이 아니라 악마라고, 게다가 그는 술에 취한 자가 아니라 매우 교활한 자라고. 또한 호자는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악마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 그리고 동물에 관해서도 질문했다. 매, 독수리, 사자, 원숭이에게 흑사병 악마가 다가갈 것인가. 호자는 즉시 그 악마는 사람에게는 사람의 탈을 쓰고, 동물에게는 쥐의 탈을 쓰고 접근한다고 말했다. 파디샤는 흑사병이 들리지 않은 먼 도시에서 고양이 오백 마리를 데려올 것과 호자가 원하는 만큼의 사람을 동해 주라고 명령했다.
결국 호자와 화자는, 몇번의 위기가 있기는 했어도 이스탄불을 휩쓸었던 전염병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호자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황실 점성술사로 격상되었을 뿐아니라, 파디샤와 매우 친밀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세 번의 쾌거는 곧 과학의 승리이자 학문의 결실이었다. 그러니 이 소설의 큰 주제를 이루는 것은 과학 또는 배움이 아닐 수 없다. 화자와 호자가 서로 닮았던 것은 단지 외양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학문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도 꼭 닮았던 것이다.
4. 소크라테스 : 나는 누구인가?

소설의 전체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자아 의식에 관한 것이다.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가? 나는 왜 나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작가는 던지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호자와 화자 사이의 유사성으로부터 시작된다. 호자가 사득 파샤로부터 화자를 데려왔을때, 호자는 화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려 했다. 즉 화자가 되려 했다. 그래,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삐걱거리며 집 안을 돌아다니던 발소리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마치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는 듯 “왜 나는 나일까?”라고 말했을 때, 나는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호자에게 그가 왜 그인지를 모른다고 말한 후, 그 문제는 그곳에서, 내가 살던 나라의 사람들이 굉장히 자주 묻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묻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이 말의 근거가 될 어떤 예나 생각은 없었다. (p. 73-74)
둘 사이의 대화 혹은 글쓰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로 말미암아 호자는 화자를, 또 화자는 호자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은 요원하기만 하다. 호자는 ‘나’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으로 옮아간다.
며칠 후부터 그는 동방에서 수입된 비싸고 깨끗한 종이에 매일 아침 ‘왜 나는 나인가’라고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제목 아래로는 다른 사람들이 왜 그토록 저질이며 바보인지에 관해서 말고는 쓰지 못했다. (p. 82)
나중에 화자는 호자가 본인의 나쁜 점까지도 솔직하게 적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자 본인이 스스로의 나쁜점을 적어내며, 호자가 비슷한 행동을 하기를 바랐다.
다음 날 오후, 그가 계속해 가도록 부추기기 위해, 그는 이렇게 작은 게임 따위에는 상처를 입지 않는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일은 바보들이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서로를 끝까지 안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 아는 사람의 마력에, 악몽을 사랑하는 것처럼,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나는 주장했다. (p. 88)
화자가 이렇게 호자를 몰아간 것은, 호자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그 틈을 타 자유를 얻으려던 심산이었다. 하지만, 흑사병의 창궐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멈추게 되었다. 이 ‘자아 찾기 놀이’는 호자가 흑사병을 퇴치하고 나서 자신감이 다시 올라왔을 때 다시 제기된다.
세번째의 성공, 즉 흑사병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호자의 권세는 차츰 높아져서 괴물 또는 곤충이라고 불렸던 최종병기를 만들 시간과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호자는 지금까지의 학문이 총 집대성된 이 무기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기는 실패했다, 하얀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성을 바라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 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는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어둠의 숲 속의 구불거리는 길로, 언덕이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 황급히 뛰어가면 그곳에 참가하고 싶은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았다. (p. 180)
내가 누구인가, 혹은 존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실패하고 말았다. 전쟁의 마지막, 호자는 마을 사람들을 심문해 사악한 과거를 고백하도록 유도했지만, 그 어떤 사람도 대단하고 악랄한 죄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소위 호자의 철학은 실패했했다.
마지막에 그리스 철학에 대해 잠시 언급되는 것은 혹시 소크라테스의 잠언을 상기하자는 것은 아닐까. 호자가 저 이탈리아로 넘어가고 화자는 이스탄불에서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와중에 그리스 철학이 언급되는 것이다.
소문들이 다시 돌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파디샤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근심을 관찰하고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걸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공연히 “우리는 우리를 잘 알고 있을까,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해.” 같은 말을 해도 나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말이 신경을 건드려도, 그의 주위에 다시 모이기 시작한 아첨꾼 중에서 그리스 철학에 관심이 있다며 잘난 체 하던 놈에게서 듣고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p. 186)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마지막에는 영민한 파디샤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간다.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호자는 화자가 되었고 화자는 호자가 되었으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성공적으로 된 것이겠다. 그런데, 아무리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었다고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던 파디샤의 깨달음이다.
역시 정원을 산책하면서 파디샤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서로 닮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파디샤가 되어야 할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나의 마지만 저항조차 꺾어 버릴 듯 되묻곤 했다. 사람들이 어는 곳에서나 서로 같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서로의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니냐고. 이제 모든 게 드러나버리고 말았다. (p. 189-190)
해설에서 역자는 이스탄불이 동양과 서양 사이의 한가운데에 위치해있으며, 파묵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정체성의 차이에 대해 자주 다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지점, 그러니까, 서양인이었던 화자와 동양인이었던 호자가 종국에는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슷해진다는 점에서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듯하다. 호자가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말도 안되는 심문을 진행할 때 동양인을 대상으로건 서양인을 대상으로건 비슷하게 허탕을 쳤다는 점에서도, 특정 인종이 특별히 나쁘지 않음을, 그러니까 인간들은 모두 어떤 보편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에선느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소크라테스처럼 ‘나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닐까.
5. 마치며
좋은 소설이 다 그렇듯이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정이 가고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세 번을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새로운 구절들이 여전히 쏟아져 나온다. 모임을 주최하기 전에 적당한 발제문도 적어봐야겠다.
참고 자료들
읽은 책의 판본
- 오르한 파묵, 「하얀 성」, 민음사, 1985(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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